사실 IMF 금융위기는 당시 재경부의 ‘97년 백서1’를 제외하고는 외환위기 자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나 백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외환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통일된 견해가 없었던거2죠.
외환위기에 대한 견해차이는 한국 경제의 체력을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기준이 됩니다. 국내의 구조적 문제로 발생하였는지, 혹은 외부적 요인 - 헷지 펀드 등 - 에 의해 발생했는지로 나뉘죠.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는 있었지만,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보는 시각이 커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원인이 외환위기를 불러왔다고 분석했고, 그에 맞춘 정책을 택해왔다는 것입니다. 앞선 1편에서는 대외적 배경을 정리했으니, 여기서는 국내의 요인을 분석하고 이후 다음편에서 해결과정을 분석해보겠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지옥같던 외환 전쟁이 발생하던 그 시기, 한국에서는 한보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이후 당진 제철소에 몰빵한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가 5조 7천억 불법대출을 한 것이 꼬리가 잡혔기 때문입니다. 정태수는 청문회장에서 “내 돈 안받은 공직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할 정도로 로비를 했었는데 여기엔 노태우를 비롯,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부터 전현직 은행장, 여야를 가리지 않은 전현직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연루되었었죠.
갑자기 한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재벌의 문제가 국내에 있어서 가장 큰 요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시대의 정부 주도 성장이 오래 이어지고 거기에 따라 금융정책이 딸려가면서, 금융과 기업이 정치에 종속된 채 움직여왔던 현상이 바로 한보 사태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정부도 80년대 이후 보호율과 보조금을 낮추고 기업평가 제도 등을 도입하여 이런 고리를 끊고자 했으나, 당장 대통령부터 비자금을 세탁해주는 조건3으로 택지 특혜 분양 사건 수사를 무마해주는 등 기득권 집단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이런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관리되지 않은 금융업계는 일본에서 단기 외채를 끌어다가 캐리 투자를 질러왔습니다. 동남아시아 시장이 성장할땐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동남아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부채 상환이 막히게 되자 비로소 이 막대한 양의 단기 외화 차입이 문제가 되었죠. 돈을 돌려받아야 되는데 받기가 힘들어졌거든요.
게다가 종금사(종합금융회사)들이 해외 (주로 일본) 지점에서 대출받은 돈은 외채에 집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4막대한 외채가 카운트되지 않던 상황에서 차입금은 점점 커져5왔고, 이건 정부도 모르고 있던 핵폭탄이 된거죠.
정부는 부랴부랴 97년 8월, 민간부문의 외채에 대한 지급보증을 선언합니다. 당장 갚을 돈이 없었던 종금사들을 위해 이때부터 정부가 민간의 외채를 대신 갚아줄 능력이 있는지 여부가 외환위기 여부를 결정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결말을 알고 있죠. 외환위기는 일어났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시 한국 정부의 문제는 재정의 불건전성이 아니라 지급보증을 한 민간의 단기외 채에 비해 정부(한국은행)가 가진 외화준비금이 너무 적었다는 점입니다6. 결제능력 부족이 아니라 단기 유동성 부족이 치명타가 되었죠. 이는 위에서 언급한 외채의 축소라는 착시와 더불어 더욱 심각하게 다가왔습니다.
외환위기 기간 동안 아무리 심각하게 경제 내적으로 약점이 있었어도 외화준비금이 많았던 중국은 외환위기를 비켜간것을 보면 단기 유동성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은행과 종금사의 외환유동성 사정이 힘들어지자 한국은행은 외환보유고를 계속 헐어서 지원, 막상 외환위기 시점이 다가오자 단 50억 달러를 제외한 모든 예치금 (총 170억 달러에 육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다 정부는 OECD 가입을 치적으로 내세웠는데, 원화가 어느정도 강세로 가야 원화로 표시된 국민소득을 달러로 환산했을 때 ‘국민소득 1만 달러’라는 치적을 유지하고 싶어했습니다. 당시엔 이게 선진국의 기준처럼 여겨졌었죠. 당시 각종 권력형 비리로 급락했던 정권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조그만 치적이라도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다 위에서 언급한 유착 등 개혁법안들을 통과시켜야 하는 상황에서도 분명 총선에서 압승을 했음에도 당시 정부여당이던 신한국당(후신이 현재의 국민의힘)은 정권교체라는 프레임에 걸리지 않기 위해 청와대와 거리를 두면서 표결에 불참, 수많은 개혁입법들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게 됩니다.
금융위기는 일본 역시 두들겼습니다. 야마이치(山一) 증권과 북해도척식은행(北海道拓殖銀行)이 파산하면서 하시모토 류타로 수상은 김영삼 대통령의 외환 대출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거기다 더해서 일본은행 마쓰시타 야스오 총재는 한국정부에 외평채 조기상환을 요구했습니다.
미국 역시 당시 한국과의 쇠고기 / 자동차 협상 과정에서 O-157 대장균 사건을 농림부-복지부 간 분쟁에서 폭로된 것7을 빌미로 슈퍼 301조를 적용할 것을 주장, 김영삼 정부는 미국에도 일본에도 손을 벌릴 수 없는 상황이 된 채 외환보유고가 말라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습니다.
IMF 금융 위기는 흔히 알려진대로 국민의 과소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적 발전모델이 가졌던 한계라도 아닙니다. 작은 위기를 국내에서 끝내지 못한 채 외환위기로 발전했다는 것이 달랐던거죠.
근본적인 이유는 정부의 외환 컨트롤의 문제였습니다. 통화불일치를 방지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단기 차입을 허용한 것입니다. 통화 불일치란, 외화로 표시된 부채와 자국통화로 계산된 자간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IMF 시기에는 외채를 알지 못한 채 위험자산에 과도하게 많은 익스포져를 부여했던 종금사들의 투자가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엔 관료들의 부패와 기업들의 무지가 있었습니다만, 가장 큰 원인은 자본시장의 개방 순서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재벌과 관료가 같이 얽힌 구조적 문제가 있었던 것, 그리고 이 문제들이 국제시장의 불안정성과 결합한 것이 일을 더욱 크게 만드는데 일조했죠.
수많은 톱니바퀴가 물려가며 마침내 폭발한 한국 외환위기, 과연 한국은 이를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그 방법은 옳았던 것일까요?
To Be Continued…
“재정경제부는 지난해 12월 31일 발간한 '97 경제백서' 에서 97년 말의 외환위기는 '내탓이었다' 고 밝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739832
이제민, 한국의 외환위기 - 원인, 해결과정과 결과 - (한국경제발전학회, 2007)
“한보그룹 총회장 정태수로 하여금 국민은행 영업부에 개설된 천수회 명의의 계좌 등 총 6개의 비실명계좌를 한보상사 정태수가 실지거래자인것처럼 실명전환” https://www.joongang.co.kr/article/3174509#home
이규성, 한국의 외환위기 - 발생··극복·그 이후 (2006)
신인석,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메커니즘에 관한 일고 (1998)
Furman and Stiglitz, 1998; Radelet and Sachs, 1998; Mishikin, 1999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4193878?sid=100